박초롱이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1

언젠가 다른 블로그에서 시베리안 허스키를 키우던 사람이 개를 떠나보내고 쓴 글을 본적이 있다.

그 개는 아마 멍청한, 나쁜 의미가 아니고 우리 덕수처럼. 개였으며, 형이 못되게 굴어서 미안했고 너무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흔한 내용이었지만, 고양이 집사로 살기 시작하면서 언젠간 그런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글을 적을까 상상했던 적도 있다. 

 

#2

참 이기적이었다.

초롱이를 처음에 데리고 온 건, 2013년 덕수의 색시로 삼기 위함이었다. 나나 아내나 모두 덕수 새끼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초롱이를 데리고 왔다. 아마 네이버 어느 까페에서 가난한 대학생이 올린 글을 보고 냉큼 줏어왔더랬다.

나이도 성묘가 지나서 적당했고, 마침 러시안블루라니 평상시에도 모셔보고 싶은 종이랬다.

덕수랑 초롱이의 합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초롱이는 덕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덕수는 모든게 서툴렀다. 짝짓기 과외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지만, 발정이난 고양이 암컷과 수컷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서 키우기는 힘들었고, 결국 둘은 모두 중성화를 했다.

초롱이는 참 눈치가 없었다.
고양이 털 알러지가 있는 아내의 배위에 올라가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고, 적당히 앵겨야 하는데 적당히를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러다가 맨날 나한테 혼나고, 머리 한대 꿍 맞고 쫓겨났다.

그렇게 시간이 무척 지났다. 처음에는 전등 스위치까지도 점프하던 용맹한 초롱이는 이제 10살의 노령묘가 되었다. 우리집 고양이들은 이제 시니어 사료만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초롱이는 방치되었다. 아이 둘 키우느랴 시간은 번개같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작년초에 초롱이 배안에 뭐가 만져진다고 했다. 아내 말이. 그 즈음부터 초롱이가 안기는데 좀 이상했다. 뭐 아는 사람처럼 폭 안겼다 나에게. 나 아프니깐 좀 안아줘 이런 느낌으로. 나는 그때부터 초롱이를 자주 안아주기 시작했다. 그게 불과 1년전이다.

다행히 양성종양이었고, 모처럼 받은 인센티브를 초롱이 수술비로 상당수 지출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때부터였다. 내 품에 잘 오지 않던 녀석은, 재택하는 날에는 하루종일 곁에 있었다. 내 의자 뒤에도 있고 내 무릎위에도 있고. 

#3

최근엔 밥도 잘 안먹고, 잠만 잤다. 지난 금요일엔 만져보니 뼈밖에 안남았다. 느낌이 너무 안좋아 재택을 하던 나 대신 아내가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췌장염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아내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었다. 아마도 많이 울었나보다. 췌장염은 재발이 잦은 병이라고도 했고, 치사율도 높았다.

24시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던가 집에서 상태를 보고 안좋으면 다시 내원하던가 하라고 했다. 초롱이는 집에 왔지만 잠시 맞은 수액발로 괜찮다가, 이내 퍼졌다. 밥을 한알도 먹지 않았다.

이대로 놔두면 오늘 밤에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3

초롱이를 데리고 24시간 동물병원으로 갔다.

초롱이를 링겔을 맞았고, 1일 1회씩 피검사를 통해 상태를 볼거라고 했다.

병실안, 케이지안에 있는 초롱이는 무척 쇠약해보였고 나는 초롱아를 불렀다. 초롱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 반응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눈이 안보이는 사람처럼. 

너무 불안했다. 왜 췌장염인데 눈에 반응이 없지. 약이 독해서 그런가 했다.

#4

다음날이었다. 

수의사는 수치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밥을 먹지를 않으니 집사가 와서 평소 먹던 밥으로 줘보라고 했다. 

마침 당근마켓 거래가 있어서,  거래를 하고 동물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낮에 보고온 초롱이는 비록 상태는 안좋았지만, 저녁에 밥만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동물병원에서 전화가 온다. 031. 느낌이 안좋아 바로 받았다.

초롱이 집사님, 응급상황이 생겼으니깐. 빨리 병원으로 와주시겠어요 했다.

#5

황급히 뛰어간 동물병원에서는 나를 수술실로 안내했다.

초롱이에게 쇼크가 왔다고 했다. 초롱이는 죽은 개처럼 혀를 내놓고 있었고, 눈은 풀려있었다.

그때부터 모든게 혼란스러웠다. 난 의사에게 물었다. 얘갑자기 왜 이래요. 아까까지만 해도 잘 앉아있었잖아요. 왜 이래요. 

쇼크가 왔다고 했다. 암이랜다. 목에 종양이 있었고, 삽관을 시도했지만, 목이 심하게 부어있어서 그때 발견했다고 했다. 일단 약물로 심정지 상태를 막았지만, 또 언젠가 될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화했고, 여기 오는게 좋을거라고 했다.

#6

마음이 너무 안좋았다.

힘들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롱이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힘들게 누워있었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오전에 초롱이에게는 차도가 없다고 했다. 다행히 밤은 넘겼지만, 많이 좋지않다고 했다.

오후에 나와 아내가 방문했다. 초롱이는 여전히 인공호흡기를 달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한번만 쓰다듬어봐도 되냐고 물었지만, 상태가 너무 안좋아서 눈으로만 보시는게 좋을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5분도 안있다가. 의사가 심장이 잘 안뛴다고 데려가서 삽관을 해야 한다고 했다.

초롱이 심장은 약물로 뛰고 있었다. 50,30,0이 되고, 눈도 못감고 그렇게 가버렸다.

#7

쇼크가 오기 바로 전에 병문안에서 나는 케이지 문을 열고 초롱이를 불렀다. 초롱아 아빠왔어.

초롱이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고양이는 턱을 만지면 좋아한다. 특히 집사가 만져주면 좋아하지. 초롱이는 내가 부르고 만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릉그릉 한다고 표현한다. 그르르르 긁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기분 좋음을 표현한다.

눈도 보이지 않던 초롱이는 그렇게 나한테 기분좋은을 표현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초롱이 암세포가 이미 뇌를 모두 잡아먹어서, 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8

링겔 다 맞고 괜찮아지면 집에 오자던 내 말이 무색하게 초롱이는 가루가 되서 유골함에 담겨왔다. 함께 찍은 가족사진 중 독사진 앞에서 조용히 놓여있다.

다음주면 아내가 초롱이가 좋아할거라고 새롭게 주문한 캣타워가 온다.

이제 사랑을 좀 주려고 했는데, 초롱이는 사랑만 주고 가버렸다.

냉장고 위도, 소파 위도, 내방 의자 위도. 온통 초롱이 흔적 뿐이데 초롱이만 없다.

당분간은 초롱이 생각하며 자주 울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이제 내 나이도 40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훌쩍 지났고, 한참 일할 나이긴 하지만 40이란 숫자가 주는 그 감각은 오묘하다.

난 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젊지만은 않은 그런 느낌이다.

내가 자주 나갔던, 지금은 코로나 떄문에 열리지도 않은 복싱 생활 체육대회에도 이제 난 40대부에 나갈 수 있다.

내가 처음 나갔을때가 30대 초반부에 나갔었으니, 시간 참 야속하다란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내 아이들이 이제 우리나라 나이로 10살, 8살이다.

오늘 경주 어디에선가 8살 아이가, 딱 우리 첫째 나이의 아이가 놀이기구를 타다가 죽었다.

재미있어 보인다고 언젠가 경주에 놀러가면 아이랑 같이 타야지 했던 놀이기구이다.

이런 뉴스가 보이게 되면, 부모로써 가지는 느낌은 비슷하다.

우리 아이에게 저런 위험한 놀이기구를 타게 하려 했다는 죄책감과 우리 아이가 저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느낌의 모순이 뒤섞여있다.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저런 놀이기구 절대 우리 아이에게 태우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도 함께 딸려온다.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했지만 안심이 되었다. 죄책감이 들지만, 속상하지만 안심이었다.

 

그 부모는 어떤 느낌일까. 

그 아이와 함께 탔다던 그 사촌누이는 어떤 기분일까.

내가 그들이었다면 나는 살 수 있을까.

그 죄책감은 어떻게 안고갈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그들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무슨 말을 건내야할까, 그 말은 과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하는 가당치도 않은 상상을 한다.

 

내 아이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아빠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게 누구라고? 둘째야?”

“나랑 언니”

“맞어 항상 명심해. 아빠 죽어도 그거 잊어먹으면 안돼”

 

내가 죽음을 처음 피부로 와닿게 느꼈던 건 우리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다. 내가 8살이었던 해다.

할머니는 온 친척들이 모두 모인 집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셨다.

다시는 못 만난다는 걸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순간 느꼈다.

내가 할머니한테 못되게 굴었던 모습들이 겹치면서 어린 나이에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는, 아빠는 계속 울었다. 아빠의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하다.

우리 아이들이 처음 느끼게 되는 죽음이란 감정은 누구일까. 나일까. 누구일까.

그게 누가 될지 모르지만,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생각은 든다.